전쟁을 반대하는 회화작품 중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되는 <게르니카>는 스페인 전쟁의 참상을 담은 작품이다. 이는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그려졌는데 그는 현대미술의 발판이기도 한 입체주의를 시작한 화가이다. 그는 표현할 자유를 중요시 여겼고 비평가들의 혹독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용기가 있었다.
목차
- 게르니카, 전쟁의 참상을 담다
- 피카소, 입체주의를 시작하다
- 표현할 자유와 실행의 용기
게르니카, 전쟁의 참상을 담다
흑백영화를 보는듯 캔버스에 보이는 색상은 흰색, 검은색, 그리고 회색뿐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울부짖는 말이 있고 말의 몸통은 창으로 찢긴 듯 큰 구멍이 나있다. 말의 왼쪽 편에는 황소가 있는데 황소의 꼬리에는 피어오르는 불꽃이 보인다. 황소의 앞에는 여자가 울부짖고 있는데 그녀의 두 팔에는 죽은 아기가 힘없이 늘어져있다. 작품의 바닥에는 군인처럼 보이는 자가 팔다리를 벌리고 쓰러져 있는데 그의 오른손에는 부서진 칼이 쥐어져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칼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문이 있고 그 문에서 한 여자가 손에 횃불을 쥔 채 말과 황소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옆쪽에는 다른 여성이 있는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괴로운 듯 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위아래로 불타고 있다. 이 그림에 그려진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들여다보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이 작품이 풍기는 우울함과 공포감은 이를 보는 순간 바로 느낄 수 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북쪽의 작은마을 게르니카에 무자비한 폭격이 일어났다. 스페인 내전 중 의뢰를 받은 독일군에 의해 가해진 공격이었고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그들의 대부분은 여자, 어린아이, 노인 등으로 전쟁과 상관없는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었던 피카소는 이 소식에 충격을 받았고 곧바로 작업을 시작해 <게르니카>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파리 국제박람회에 마련된 스페인관의 벽화로 공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혐오감으로 피카소는 그의 작품을 자신의 고국이 아닌 미국의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해 주었고 내전이 끝난 후 42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왔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피카소, 입체주의를 시작하다
피카소 이전의 회화 작품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점이 캔버스에 표현되는 형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대상을 보는것 처럼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미술의 아름다움이라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피카소는 한 표면 위에 대상의 앞과 뒤, 위와 아래, 양 옆까지 모두 표현하기를 원했고, 그동안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형식의 회화를 완성했다.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기괴함에 놀랐다. 이전의 회화에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아름답게 표현되던 여성의 몸은 균형이 맞지 않은 투박하고 커다란 덩어리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혹적인 눈은 얼굴에 어색하게 붙은 도형의 모습이었다. 몸은 뒤돌아 앉아 있는데 얼굴은 완벽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부자연스러웠다.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입체주의의 시작이 되었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피카소의 작품들을 보며 혹평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창의적인 표현방식이 천재적이라 극찬하였다. 피카소에 의해 시작된 입체주의는 후에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현대미술의 발판이 되었다.
표현할 자유와 실행의 용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처음 보았을때 한 단어만 생각났다. 전쟁. 그는 폭격으로 인해 폐허가 된 게르니카 마을에 대한 기사를 보고 이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폭격기나 폭탄이 없다. 심지어 그림에 그려진 황소나 말, 사람들은 그 모습이 과장되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놀라운 사실은 직접적인 묘사가 없이도 피카소는 전쟁의 고통과 슬픔, 그 비참함을 자신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것이다. 흰색과 검은색의 혼합만으로 전쟁의 어둠과 공포가 캔버스에 가득하다. 피카소는 이 그림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황소는 황소이고, 말은 말이다. 그림은 내가 그렸지만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이 그림을 보는 이들이 생각하는 의미가 내가 생각하는 의미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의미를 생각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한 캔버스에 여러 개의 시각을 담았고 사람들의 비판 속에서도 표현할 자유를 계속해서 추구했다. 그의 자유로운 표현방식은 제한적이었던 미술의 세계를 확장시켰고 생각의 틀을 깨는 놀라운 작품들이 세상에 나오게 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에게 실행의 용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입체주의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아주 가난한 화가로 그의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셀 수 없이 많은 명작을 창조해 냈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작품이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 같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90년이 넘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아틀리에에 머물며 작품을 창조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이를 실행해 옮기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꾸준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