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앙리 마티스는 순수한 색채 그대로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했다. 그는 과감한 색채를 이용하여 그의 아내를 그려냈고, 이 작품에는 야수파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티스의 화풍이 잘 드러나 있다.
목차
- 검은 옷을 입은 마티스의 아내
- 앙리 마티스 : 과감한 색채의 대가
- 야수파의 아버지
검은 옷을 입은 마티스의 아내
화려한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여인이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모자는 그녀의 얼굴보다 크고 온갖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그녀가 귀부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초력색 장갑을 끼고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 여인을 잘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물을 그리는 초상화에는 피부색인 살색 또는 갈색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 그림에서 묘사된 얼굴은 주로 초록색이다. 하지만 초록색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다. 그림에 그려진 여인은 마티스의 아내인 아멜리 마티스이다. 그는 아내에게 화려한 모자와 우아한 드레스를 입게 하고 부채까지 손에 들게 했다. 놀라운 사실은 마티스가 이 그림을 그릴 때 아멜리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검은 모자와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은색 부채를 들고 있는 아내를 보고 마티스는 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노골적인 색상의 선택과 거친 붓터치는 그림을 더욱 야생적으로 보이게 했고 미완성처럼 보이는 그림은 충격적이었다. 어떤 비평가는 마티스가 물감통을 대중의 얼굴에 집어던졌다고 혹평했고, 심지어 이 그림을 구입한 사람도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더러운 페인트 얼룩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이 짐적이라고 했고 이는 그를 야수파의 아버지로 만들었다. 1905년에 완성된 모자를 쓴 여인은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앙리 마티스 : 과감한 색채의 대가
야수파의 시작이자 아버지라고 불리는 앙리 마티스는 놀랍게도 원래 재판행정담당 서기였다. 어느 날 그는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했고 회복하는 동안 지루할 수도 있을 그를 위해 어머니는 물감을 선물해 주었다. 휴식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마티스는 회화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게 되고 법률 공부를 포기한 후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때 당시 그는 20대 초반이었다.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중 앙드레 드랭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둘은 함께 여행하며 빛의 표현에 대한 공부를 했다. 당시에 유행했던 빛의 표현은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을 대비하는 것이었지만 마티스는 색다른 방법으로 빛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는 서로 다른 색을 대비하여 빛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이는 그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색채 표현은 어두운 형태에서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와 함께 야수파를 일으켰을 때는 온갖 색채가 화려하게 폭발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는 섞이지 않은 원색의 조합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내었고 거기에 느리고 거친 붓놀림을 사용했다. 이는 그를 야수파의 아버지로 만드는 중심점이 되었다. 후에 그는 20세기 입체파의 대표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도 친구가 되어 서로의 작품을 공유하며 발전해 나갔다.
야수파의 아버지
법률 관련 직업에서 큰 턴을 하여 화가가 된 앙리 마티스. 그의 시작은 다른 화가들 보다 다소 늦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그 어떤 화가보다도 영향력 있었다. 마티스는 당시 선과 명암을 중시하던 미술계에 색채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큰 획을 그었다. 그는 색채야 말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생각했고 원초적 색상을 이용해서 대상에 대해 그가 느낀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의 과감한 행보는 후에 추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까지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솟구쳤던 마티스는 더 이상 이젤 앞에 앉을 수 없을 때까지도 미술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는 십이지장암으로 인해 수술을 받은 후에 이젤 앞에 앉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거침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냈고 종이를 잘라서 그림을 그리는 그만의 특이한 미술기법을 만들어냈다. 미술에 대해서 그는 진정한 야수였다. 야수파는 사실상 2년 정도 불타오르듯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강렬함은 계속되어 그를 야수파의 아버지로, 또한 20세기의 대표화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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