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시작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림의 주제를 벗어나 남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목차
- 풀밭 위의 이상한 점심식사
- 인상주의의 아버지 마네
- 보이는 대로 그리다
풀밭 위의 이상한 점심식사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숲 속의 풀밭 위에 세 사람이 있다. 여자는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앉아서 손으로 턱을 받치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옆에는 흰 바지와 어두운 색의 재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베레모를 쓴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정장을 입고 지팡이를 왼손에 든 채 풀밭에 기대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흥미롭게도 모두가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앞에는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옷과 모자들이 널브러져 있고 그 위로 쓰러져 있는 과일 바구니에서 과일과 빵이 쏟아져 나와있다. 그들의 뒤편으로는 물가가 보이고 그곳에서는 속치마만 입은 듯 한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그녀가 그녀의 옆에 있는 배보다 크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에두아르 마네가 그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1863년 프랑스의 살롱전에 출품되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며 결국은 낙선된 작품들만 전시되는 낙선전에서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가로가 208센티미터 세로가 66센티미터로 엄청난 크기로 제작된 이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매우 흔했지만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던 매춘을 묘사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완전히 무시한 그의 새로운 시도는 현대 미술의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현재 이 작품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 마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그때까지 중요시되어오던 전통적 회화기법이 아닌 새로운 회화를 위한 예술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당시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나아가는데 큰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가 출품한 작품들은 보수적인 심사원들에게는 질이 떨어지고 당황스러운 그림들이었지만, 당시의 젊은 화가들에게는 큰 충격과 동시에 도전정신을 주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그려진 캔버스는 굉장히 큰 크기였다. 이 크기의 캔버스에는 역사화나 종교화 같은 상상으로나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마네는 그 룰을 과감히 깨버린다. 그는 역사화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다고 했지만 상상의 인물이 아닌 파리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렸다. 또한 인물들에게 고전적인 의상이 아닌 근대적인 의상을 입힘으로써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당시 절대 입에 올리지 않던 것들이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사실,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네는 한 번도 인상주의 작품전에 자신의 그림을 내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도 인상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미술적 기법은 인상주의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중간의 색이 없이 어두운 색과 밝은 색만을 이용했고, 남자와 여자, 어둠과 밝음, 벗은 몸과 옷을 입은 몸과 같이 대비되는 요소들을 사용했다. 또한 원근감과 명암의 표현을 최소로 사용하여 과거의 틀에서 벗어났다. 그가 거침없이 시도한 새로운 기법들은 젊은 화가들이 인상파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발판이 된 것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다
마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법률 관련 직업을 갖기를 원했지만 그는 사실상 그렇게 머리가 좋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군인이 되기로 했는데 그 또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결국 그가 원했던 대로 화가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 화가들은 부유한 계층에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네의 사정은 아주 달랐다. 그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이 보기 원하는 그림이 아닌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 그리기로 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만약 부유층이 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벌거벗은 두 여인이 아닌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모자를 쓴 두 여인이 그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만연했던 매춘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재정적으로 풍부했기 때문에 생긴 용기일지 모르겠지만 마네는 자신이 보는 것을 계속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를 보이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파리 미술계에서 유명세를 얻으려면 꼭 거쳐가야 한다는 살롱전에서 낙선을 거듭했지만 살롱전에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했던 수많은 화가들에게 환영받았다. 무거운 전통의 무게 앞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마네 덕분에 수많은 형태의 새로운 미술이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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