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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티우스의 맹세 : 신고전주의 대표 다비드의 정치선전그림

by honeykbongbong 2023. 1. 4.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의 낭만주의를 반대하며 일어난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그는 그의 작품인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통해 개인보다는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이 밖에도 국정에 힘을 실어주는 다양한 정치선전그림을 그렸다. 

목차 

  •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 다비드,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다
  • 정치선전그림의 힘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의 맹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무장한 세 형제가 비장한 표정을 하고 앞에 선 아버지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들은 서로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줄 날카롭게 다듬어진 검을 높이 들고 있다. 그들의 뒤에는 세명의 여인들이 슬픔에 잠겨있다. 한 여인은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안고 흐느끼고 있고 나머지 두 여인은 남편이나 형제를 잃을 두려움에 울고 있다. 선명한 색상으로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려진 이 작품은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1785년에 완성한 호라티우스의 맹세이다. 이는 로마 역사의 한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바로 로마와 알바 두 도시 사이에 일어난 전쟁일화이다. 기원전 7세기, 로마와 알바는 국경 전을 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두 도시는 각각을 대표할 3인의 남성을 뽑아 싸우게 하기로 하고, 그 싸움에서 승패를 가르기로 했다. 로마의 대표로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가 뽑혔고, 알바의 대표로는 쿠리아티우스의 세 형제가 뽑혔다. 하지만 이 승부는 시작부터 비극적이었다. 호라티우스의 여동생 카밀라는 사실 쿠리아티우스의 세 형제 중 한 명과 약혼한 사이였던 것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던지 지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녀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호라티우스의 세 형제 중 하나만이 이 싸움에서 살아남았고 로마로 돌아왔다. 카밀라는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어 슬퍼했고 그의 오빠는 그녀를 알바를 위해 눈물 흘린 대역죄로 살해했다. 이 작품에 그려진 장면은 호라티우스 형제가 싸움터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 앞에 서있는 모습이다. 다비드는 세 형제를 강인하고 비장한 모습으로 그려내었고 그와 정반대로 여성들을 뒤에서 울기만 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내어 극적효과를 냈다. 신고전주의의 모범이라고도 불리는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현재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비드,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미를 중요시하던 프랑수아 부셰의 낭만주의의 열기가 식기 시작한 때에 신고전주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비드는 신고전주의에 불을 붙인 화가로 낭만적인 미술이 아닌 형식적이고 엄격한 고대의 미술양식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입장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낭만주의의 대가였던 부셰의 친척이었다는 것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다비드는 좋은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그의 가족이 원하던 건축가가 아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부셰는 그에게 직접 사사하는 대신 당시 고전적 시각을 가지고 있던 화가인 비엥을 소개해줬고 이는 신고전주의가 탄생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정교한 표현력과 탁월한 색채 표현력을 사용해 놀라운 수준의 역사화를 그려냈고 이는 당시 정치인들에게 특히나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혁명의 시대에 다비드는 보수적인 공화주의자로서 자신의 작품에서도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개인보다는 국가의 이익이 먼저라는 사상은 그의 그림 전반에 표현되어있었고 지도자의 모습을 신성하게 표현하여 절대적 권력을 칭송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 때문에 그는 투옥되기도 하고 화가로써의 명성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후에 나폴레옹 황제의 궁정화가로 선택받으면서 더 큰 명성과 부를 얻었다. 그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정치선전물로 제작되었지만 섬세하고 생동적인 표현으로 당시의 영웅적인 황제의 모습을 드러내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정치선전그림의 힘  

다비드는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화가라 칭송받지만 정치적 성향이 굉장히 강했다. 프랑스혁명이 시작되던 때에 많은 화가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꿋꿋이 그곳에 남아 그의 정치적 신념을 작품을 통해 드러냈다. 그의 혁명적 성향이 드러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는 당시 최고의 미술학교였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는 당시 미술계 최고상인 로마상에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그의 실패 원인이 당시 로마상을 뽑던 보수적인 평가단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로마상을 수여하고 그 혜택으로 로마에 유학을 다녀온 다음 프랑스혁명의 한 부분으로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폐지시켰다. 그는 역사화를 많이 그렸는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것들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프랑스를 이끌던 지도자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고 그들이 하는 정치행위들을 정당하게 보이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이 때문인지 그는 지도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혁명으로 인해 그가 지지하던 지도자가 처형당했을 때도 그는 다른 정치 지도자와 손을 잡으며 살아남았다. 회화에는 다양한 힘이 있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이겨내는 힘, 정신적 고통을 해소하는 힘, 그리고 정치적 이념을 심어주는 힘. 이것의 옳고 그름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미술이 가진 힘은 위대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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